■ 55세 김미현씨, 농진청 연구원 접고 의류 수거업체 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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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새로운 일에 부딪쳐 보기 전에 주변 환경이나 이목 등을 너무 신경 쓰시는 것 같아요.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하실 필요가 없지 않은가요?”
전주시 전미동 재활용의류 수출업체인 (유)우리산업에서 근무하는 김미현 씨(55)는 의류 수거 도중 속눈썹에 하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전주시 여성인력개발센터 소개로 지난해 8월부터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김 씨는 하루 종일 서서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먼지가 가득한 옷가지들을 분류한다. 이 옷들 중 쓸만한 것들은 동남아 등지로 수출된다.
김 씨는 현재 인생의 2막을 넘어 3막, 4막 째를 살고 있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198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그는 대학 2학년 때 현재 삼성에 다니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1남 1녀를 뒀다.
결혼하면서 미술학도의 길을 접은 김 씨는 대신 신한은행에 입사해 은행원이 됐지만 IMF가 터지면서 불어닥친 정리해고 바람속에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후 다시 수원시 권선구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사회복지 업무를 맡았지만 건강이 썩 좋지 않아 힘든 사회복지 업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 8년 만에 일을 그만 뒀다.
그의 세 번째 직장은 농촌진흥청으로 연구원을 돕는 예비연구원이 돼 연구를 보조했다.
은행원에서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으로, 또다시 농진청 보조연구원으로 남들은 쉽게 얻기 힘든 자리를 김 씨가 연이어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월남전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대령 전역) 덕분에 국가유공자 자녀가 됐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다니던 삼성그룹에서 퇴직하고 농진청이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두 사람은 고심 끝에 지난 2014년 전북으로 이사하기로 뜻을 모았고 남편의 고향인 완주 소양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북혁신도시까지 출퇴근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계약기간 만료도 다가와 재계약을 포기하고 농진청을 떠났다.
부부의 연금으로도 충분히 남은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집에 틀어박혀있기 보다는 일을 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전주시 여성인력개발센터를 찾았고, 센터에서 제안한 재활용의류 수거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수는 농촌진흥청 근무 때 보다 턱없이 적은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마냥 기쁜 김 씨다.
김 씨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일을 한다는 것이 기뻤어요. 4대 보험도 다 되고 공휴일에는 쉬고, 안정된 직장이지요”라며 “조금 더 여유가 된다면 대학교 때 하다 만 천연염색 등에도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